* 이 게시물은 로스트아크와 볼다이크의 스토리를 다루기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
#1. 볼다이크의 대략적 이야기
마지막 아크인 영원의 카양겔을 얻은 아크의 계승자는 주시자 베아트리스의 인도에 따라 주신 루페온과 함께 사라진 열쇠, "로스트아크"의 행방을 쫓아 현자들의 땅인 볼다이크로 향한다.
모든 지식이 모이는 신비로운 공간인 움벨라의 전설을 듣게 된 계승자는 움벨라에 접근하기 위해 직접 현자가 되기로 한다.
인연이 닿아 만난 현자 지망생 마리우와 그의 스승인 닐라이의 도움으로 현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계승자는 현자의 힘을 응축시킨 "황금의 길"과 그것을 정련해 만들어 낸 인공 생명체 "호문쿨루스"를 알고 배우게 된다.
결국 직접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낸 계승자는 현자 시험을 기다리며 호문쿨루스와 시간을 보내며 유대감을 쌓게 된다.
주인공이 현자가 된 이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상급현자 마레가와의 갈등을 겪게 된다. 마레가는 다가올 가디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계승자의 호문쿨루스를 해체하여 기술을 얻고자 계승자를 설득한다. 호문쿨루스의 해체는 기능정지 즉 죽음이었기에 계승자는 이를 거부, 마레가는 "고작 호문쿨루스 따위"가 인류의 미래보다 중요하냐며 격분하여 강제로 호문쿨루스를 해체하려 한다.
대현자 세헤라데의 개입으로 해체는 막았지만 무너져가는 호문쿨루스를 복구하기위해 계승자는 세헤라데, 마리우와 함께 분투하여 결국 호문쿨루스를 치료한다. 호문쿨루스를 되살리는 계승자의 노력에 대현자 세헤라데는 그를 움벨라로 데려간다.
움벨라에서 로스트아크에 대한 지식을 얻은 주인공은 현자의 탑으로 돌아오지만 가디언의 공격을 받으며 현자의 탑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볼다이크, 나아가 아크라시아 전체를 지키기 위해 현자들은 긴 시간을 기다린 투쟁을 시작한다.
대현자 세헤라데는 선대 대현자가 만들어낸 호문쿨루스였음이 밝혀지고 세헤라데는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의 명령이자 목적을 위해 자신과 현자의 탑의 힘을 개방하여 싸워 나간다. "모든 현자들을 지킨다."
결국 계승자 일행은 차원의 문을 여는 혼돈의 가디언 라자람을 물리쳤지만 그 과정에서 마레가는 자신을 희생하여 대현자의 힘을 해방했으며 대현자는 모든 힘을 쏟아내어 핵만을 남기고 소멸한다.
거대한 위협을 막아낸 현자의 탑은 이후 재건에 들어갔으며 계승자는 현자이자 한명의 인간, 그리고 아크의 계승자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인간으로서 결의를 다지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2. 상급현자 마레가 : 가장 나약한 존재들의 비참한 발버둥
로스트아크에서의 인간은 강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총애를 받은 세 종족, 할족과 실린 그리고 라제니스들에 비하면 그들에게는 내세울 만한 강함이나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 종족이 주축이 되었던 고대의 시대에 인간은 더욱 나약한 존재였고 역사에 그들이 설 공간은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무력한 희생자
혼돈의 가디언의 위협이 도래했을때, 가진 힘이 없던 인간은 가장 처참하게 무너졌다. 수많은 인간이 희생당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이크리아의 주도 아래, 가디언에 대항할 조직인 상아탑이 라사모아에 처음 세워졌다. 후에 마이어의 의지로 세워진 두 번째 상아탑이 볼다이크의 현자의 탑이 되었다.
무력한 인간이 초월적인 힘을 가진 가디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더 이상 무력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현자의 탑과 현자들은 존재한다. 너무도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대신할 호문쿨루스의 존재 역시 이러한 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선대 대현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마레가 역시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가디언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큰 위험을 감수하고 혼돈의 가디언 라자람을 봉인하여 연구하고 있던 것이다.
가디언의 위협은 시시각각 다가오며 인간은 아직 그들과 맞설 수 없었기에, 마레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마레가는 같은 현자이자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는 동지인 계승자의 호문쿨루스에 담긴 힘을 발견했다. 그것이 가디언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마레가는 계승자에게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며 호문쿨루스를 해체하는 것에 동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마레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듣는다. 계승자는 해체를 거부한다.
마레가는 계승자의 태도에 격분한다. 그의 시선에 계승자는 하찮은 도구와 인류의 미래를 맞바꾸려는 어리석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레가에게 있어 나약한 인간을 대신해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를 인간의 운명과 미래보다 앞서 생각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은 뒤바뀐 것이다. 세헤라데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계승자와 마레가는 이곳에서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을 것이다.
가디언이 대대적으로 볼다이크를 침공하자, 마레가는 누구보다 앞장서 탑을 지켜내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토록 도구시했던 호문쿨루스, 대현자 세헤라데에게 모든 힘을 넘기고 소멸한다.
선대 대현자 아덴토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마레가는 마음 깊이 그의 스승을 존경하고 그를 인간의 희망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와 함께 탑을 나와 연구하던 마레가는 스승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스승인 대현자 아덴토가 그의 심장을 재료로 완벽한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차기 대현자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마레가는 그것을 극구 만류했지만 스승의 뜻은 완고했고 마레가는 결국 스승의 뜻을 받들어 그의 심장으로 호문쿨루스 세헤라데를 만들어 현자의 탑으로 돌아간다.
현자의 탑에 돌아온 마레가는 동료 현자들에게 '대현자 아덴토는 사망했고 그가 세헤라데를 차기 대현자로 지목했으니 이에 따르라.'는 명령을 한다. 그러면서 마레가는 동료 현자들에게 세헤라데가 호문쿨루스이며 대현자의 심장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승의 뜻을, 인간의 미래만을 생각했던 마레가였기에 자신과 세헤라데에게 오는 오명과 의심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짐을 짊어지고자 한 것이다.
"오직 현자들을 지킨다."라는 명령을 받았을 터인 호문쿨루스 세헤라데는 마레가의 생각과는 달리 도구로써의 삶을 살지 않았다. 세헤라데는 현자의 탑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며 호문쿨루스 폐기장인 무능의 무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너무나 소중한 스승의 목숨을 받아 대현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호문쿨루스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마레가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마레가의 '호문쿨루스는 도구에 불과하다.' 라는 생각이 이때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볼다이크의 모든 이야기가 끝난 시점에서 마레가는 오직 인간을 위해 살다 인간을 위해 죽은 영웅서사를 가진 매력적인 빌런으로 평가할 수 있다. 비록 계승자의 호문쿨루스를 해체하고자 한 과정에서 과격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마레가의 입장에서 그저 하급 호문쿨루스를 지키고자 한 계승자의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같은 현자, 같은 인간으로서의 배신감마저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다이크의 이야기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마레가에 대한 서사가 너무나 부족함을 느낀다. 그저 계승자의 호문쿨루스를 해체하려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인류의 수호자, 운명의 극복자가 아닌 그저 지나가는 대척자로서 보이고 있다. 가디언의 맞선 인간의 발버둥이라는 좋은 주제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소모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사실 마레가가 이야기에서 그가 "정의"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마레가라는 인물 자체의 서사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야기 속에서 주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의조차 명확하게 내리지 않고 스쳐 지나간 "호문쿨루스"에 대한 서사 부족에 있다.
#3. 호문쿨루스 : 결국 이들은 도구인가 생명체인가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인가.
본문에서도 호문쿨루스를 설명할 때 다소 두서없는 용어를 사용했다. "치료"라는 인격적인 표현을 사용했기도 했지만 "파괴"라는 비인격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볼다이크의 스토리는 호문쿨루스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볼다이크 스토리의 거의 모든 가치적 충돌은 여기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한다.
"호문쿨루스는 도구인가, 생명인가 ㅡ 아니면 그 사이의 무언가 인가."
볼다이크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호문쿨루스라는 존재가 도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헤라데는 호문쿨루스들을 "아이들"이라는 인격적 표현으로 불러주며 호문쿨루스를 도구로써 인식하는 현자들의 태도에 상당한 회의감을 느낀다. 계승자의 조력자인 마리우도 호문쿨루스를 도구로써 바라본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호문쿨루스의 인격에 대한 고뇌를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호문쿨루스가 도구가 아니다라는 수준에서 논의를 멈춘다. 도구가 아닌 다른 무엇인지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심지어 이 존재가 생명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다. 이 존재가 생명이 아니라면, 도구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의 서사는 참으로 공허해진다. 생명이 없는 물체에 우리는 어떠한 주체성도 부여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존재를 생명체로써 느낀다면 그것은 이 존재가 감정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존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스스로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결국 호문쿨루스와 이야기에 몰입하는 "나"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존재의 애매한 위치보다 더욱 난해한 것은, 이야기 내에서 이러한 생명에 관한 고뇌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도구에 불과하지 않는가?"라는 마레가의 말에 과묵한 주인공인 계승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옆에서 누구보다 그 말을 부정해 줘야 할 마리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 스스로도 호문쿨루스가 도구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계승자와 마리우는 자신들의 독단으로 세헤라데를 부활시킨다. 자신의 사명을 다한 세헤라데는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채 소멸하지만 마리우는 이것을 무시하고 그저 그녀에게 새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부활시켰다. 게다가 세헤라데는 정상적인 상태로 부활한 것도 아닌 기억을 모두 잃고 어려진 상태로 부활하여 그녀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세헤라데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부활시키고자 한 것도 큰 윤리적 문제이지만 차지하고서도, 정신과 육신 또한 온전치 못하게 만들어 놓고 "대현자님이 작아지셨어..!"와 같은 무책임하고 달관적인 태도로 임하는 것은 도저히 좋게 봐주기 힘들다. 스스로 호문쿨루스가 도구가 아님을 주장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호문쿨루스를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도구로써 취급하고 있는 모습은 이야기를 감상하는 입장에서 참으로 의아하고 실망스러울 뿐이다. 오히려 세헤라데 소멸 이후의 이야기를 전부 없애는 게 스토리가 더 매끄러워질 정도이니 말이다.
#4. 결론 / 짧은 요약
정리하면 볼다이크의 스토리는 나약한 인간의 분투와 호문쿨루스라는 존재에 대한 심도 있는 고뇌가 담길 수 있었지만 너무 빠르고 두서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거대한 주제의식과는 다르게 그 속의 내용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부실했다.
그러나 사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은 "스토리가 매끄럽지 않게 흘러갔다." 일 뿐이지 그렇게 로스트아크의 이야기에 치명적이지는 않다. 결국 볼다이크 이야기의 핵심은 로스트아크에 대한 힌트를 얻는 것이고 혼돈의 가디언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다리는 그보다 얇은 기둥에 의해 받쳐지는 법, 메인 스토리로 향하는 길에 눈에 띌정도로 부실한 점이 이렇게 많다는 점은 우리가 스토리에 몰입하는 것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모든 게임이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갖춰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야기는 충분히 가벼울 수 있고, 콘솔게임보다 더 접근성이 좋고 폭넓은 유저층을 가지는 게임에서는 이야기의 무게가 무겁지 않은 편이 좋다. 그러나 무겁게 다루어져야 하는 표면적 주제를 준비해 놓고 가볍게 지나간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감상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맥 빠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플레이어 개인이 아닌 시나리오 작가 스스로일 것이다. 아무쪼록 매력적인 게임의 매력적인 스토리에 더 이상의 아쉬운 점이 남지 않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2024년 02월 05일